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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기행 2부. 역사 테마기행 수원화성 - 정조의 숨결을 느끼다


화성 기행 2부. 역사 테마기행 수원화성 - 정조의 숨결을 느끼다





화성 기행 2부. 역사 테마기행 수원화성 - 정조의 숨결을 느끼다


산부인과의사 밴드놔 카카오톡 모임방에서 우연하 시작된 수원화성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실제로 이 날 모이기로 제안을 한 것은 나였다

아마 날을 얼른 지정하고 이 날 올 수 있는 사람들 모입시다 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임도 늘 그렇듯이 온라인 상의 말들로만 끝났을 지 모른다

수원의 박 선생님과 내가 주도적으로 모임을 준비하고 꽃세산부인과 김원장님과 몇 분들의 호응이 있어 이 날 드디어 9명의 놀기 좋아하는 의사들이 수원 화성에 모였다


날씨는 좀 더웠고 시작할땐 구름이 끼었는데 시간 지나니 완전 햇볕 쨍쨍 초여름 날씨였다


미리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오신 박원장님 덕분이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기만 하면 되었다


수원 화성은 미리 공부 해서 알겠지만  문이 동서남북 4군데 있고 그 문을 옹성으로 연결을 해주는데 남문인 팔달문만 옹성과 단절이 되어있다

어느 문에서 성곽 걷기를 해도 상관 없지만 우리는 오르막길을 덜 오르기 위해 화성열차를 타고 팔달산 정상 가까이 가서 내려오는 코스로 돌아보기로 하였다

    





맨 아래 사진이 화성열차가 운행하는 코스인데  현위치는 열차의 도착지점이고 우리는 맨 우측의 동장대(연무대)에서 화성열차를 탑승하였다

기차를 타고 동--->북---> 서쪽으로 이동


세번째 사진의 남쪽 팔달문 근처에 있는 서남암문과 서남각루를 먼저 보고(오르막 계단)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7시 방향의 서남암문 - 9시 방향 서장대 - 10시 방향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12시 방향의 장안문 - 그리고 2시 방향의 동장대로 원점회귀....

10시경에 시작하여 3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1시에 다시 연무대 도착  30분 후 국궁체험하고 식당으로 출발하였다

 

아쉽게도 창룡문에서 팔달문 까지의 동남쪽 성곽은 보지 못하였다  물론 행궁도 못 보았고...

이 코스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었다..







어가열차라고도 부르는 화성열차를 탔다

시간을 절약하고 오르막 구간을 좀 편하게 오르게 하기 위한거...




처음에는 여기가 어딘지 몰랐는데 다 돌아보고나니 알게되었다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천




방화수류정의 다른 각도에서의 모습

네 방향에서 보이는 정자의 모습이 다 다르다고 한다




성곽에는 이런 포루가 군데 군데 있다

북동포루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북문)







  북서포루인지 서포루인지 ^^







서북공심돈







화서문(서문)













장안공원





서북각루







팔달산의 사찰인 성신사

화성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절





성신사 옆에서 팔달산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화성의 남쪽 성곽이다

보이는 약간 허름한 누각이 남포루이다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수원 화성을 찾은 산부인과 의사들

서울 수원 대구에서 모여든..












서남 암문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舖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길 이 길은 용도라고 불리운다

甬道  골목이라는 뜻




용도 좌우에 치가 설치돼있어  성 밖의 적군을 살피고 공격하기 좋다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서남각루에서 바라본 용도와 서남암문





서남각루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 (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장용영의 담당부대별 영역표시 비석


장용영은 장안위 창룡위 팔달위 화서위 네 부대로 구성돼있다 각각 북 동 남 서 쪽을 담당..

서남각루는 화서위와 팔달위의 경계지점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서남각루에서 서장대(팔달산 정상) 가는 길





각종 꽃들이 만발..





서포루


서포루가 북해도의 사포로 어원?  ^^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서암문에서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암문의 안팎에다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하였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정조대왕의 친필 화성장대













팔달산 정상 (서장대) 에서 바라본 화성 전경

중간에 화성행궁이 보인다


맨 아래 강남여성병원

성영모 원장님 명의라는 소문이...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화서문...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화서문 가는 길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공심돈



공심돈(空心墩)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 (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공심돈









화성열차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장안문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북동적대와 북동치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와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복원 상태이다






북수문



남북으로 두개의 수문이 있다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각루(角樓)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 (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북포루(北舖樓), 서포루(西舖樓)등이있다.


동북포루(東北舖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연무대=동장대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동북 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국궁체험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