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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경기 강원

화성 기행 1부. 세계문화유산 화성-성곽문화의 꽃을 만나다




위의 제목은 사단법인 회성연구회에서 펴낸 화성을 소개한 책자의 제목이다

그 책 제목을 그대로 나의 지난주 일요일에 잇었던 수원 화성 탐방 후기의 제목으로 써 본다

그 책은 같이 걸었던 동료 산부인과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수원에 살고 화성 연구회에 몸담은적 있었던...


오래전부터 수원의 화성을 가보고싶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역사를 읽고 알게되면서 정조의 숨결이 깃들어있는 화성을 그리고 윤건릉을 반드시 꼭 한번은 가보고 싶던 차에

이번에 우연히 몇몇 산부인과 의사들끼리 역사 기행이란 거창한 제목의 모임을 갖게 되면서 결국은 나도 화성을 가보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와 이러한 역사의 유적에 원래 관심이 많다...아무래도 난 이과보다는 문과 체질이 맞는 듯 하다  우리 역사가 좋다...



최근 조선실록을 공부하면서 영조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자연스레 화성과 융건릉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는데..


내가 공부하여 알게된 짧은 지식의 범위 안에서 정조와 화성 건설에 대해 간략하게 먼저 설명을 하고자 한다










화성연구회의 수원화성 소개한 책자의 일부..


수원의 화성은  정조 18년인 179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2년후인 1796년에 완공되었다

처음부터 화성을 건설할려고 작정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고 화성을 축조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묘)을 이장하면서부터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한양 남쪽에 있는 수원부에 오래전부터 봐온 명당자리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융건릉자리이다. 이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다.

그 명당자리는 풍수지리 전문가인 고산 윤선도가 강력추천하기도 했지만 사도세자 역시도 그 명당자리에 묻히고싶은 뜻을 어린 정조에게 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래 사도세자는 양주군(지금의 동대문구) 배봉산 자락에 있는 영우원에 묻혀있었다.


정조는 즉위직후에 당장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힘이 없었다.

할아버지 영조와의 약속(절대로 사도세자의 일을 거론하지 않는다)도 마음에 걸렸고  실권을 쥐고있던 노론들의 눈치도 봐야하고...

그러다 정조는 재위 13년에 드디어 자신의 꿈인 사도세자의 원침을 영우원에서 수원의 현륭원으로 이장하게 된다    

대신들을 설득한 명분은 왕손이 귀한 원인이 사도세자의 묘터가 안좋아서 그러하니 묘를 이장하면 왕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효종 이후의 조선 후기의 임금들이 다 그렇듯이 왕손이 참 귀했다  현종도 독자이고 숙종도 그렇다

숙종도 정비인 인현왕후에게서 자손이 없었고 후궁인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뒤를 이었고 경종도 자식 없이 죽었고 이복동생인 영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영조의 두 아들 중 효장세자는 열살에 요절하고 남은 아들이라고는 사도세자 뿐이었고 비운의 사도세자도 또한 장남인 의소세손이 두 살에 죽고 차남인 정조 이산을 남기고 뒤주에 갇혀 죽었다

하나 남은 아들인 세손 이산 (정조)이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 되었지만 정조 또는 무슨 영문인지 아들 복이 참 없었다

사랑하는 부인 의빈 성씨(성송연)에게서 얻은 첫아들 (문효세자)을 어릴때 잃고 부인마저 일찍 죽었다

왕자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자리가 안 좋아서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정조가 직접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파보니 관은 시커멓게 썩어있었고 물이 고여있었다고 한다

매우 안 좋은 묘자리였던 것.

정조는 왕손을 얻지 못한 이유가 묘를 잘못 써서 그렇다고 대신들을 설득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이장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정조는 사도세자의 생전의 바람대로 고산 윤성도가 그토록 명당이라고 칭송한 수원으로 사도세자의 원침을 이장하여 현륭원을 만들고 근처에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절을 짓는다. 그 절이 바로 용주사이다


왕릉 주변에는 민가나 마을이 존재하면 안되었기에 정조는 마을을 대대적으로 이주를 시킨다

조선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나온 대로 지금의 수원 팔달산 동쪽으로 이주를 시켜서 신도시를 만들고 화성이라 이름을 지었다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화성은 그렇게 탄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화성의 모양이 위에서 보면 네모나 둥근 원형 모양이 아니라 나뭇잎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성곽모양이 구불하게 굽어있는 이유는 성을 축조할때 기존의 백성들이 사는 마을을 철거하거나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 축조후 정조는 매주마다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휴양도 하고 아버지 묘소에 참배도 할 목적으로...

그리고 화성축조후 수원부를 수원유수부로 격상시킨다  요즘으로 치면 조그만 시에서 광역시로 격상시킨 것과 비슷하겠다


직속 부대인 장용영을 주둔시켜 화성을 지키게 만들었고 1805년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던 정조는  그러나

재위 25년인 1800년에 의문의 죽음으로 개혁군주의 꿈을 접고만다.

조선 역사상 가장 왕성하고 융성한 시점에서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조선의 융성과 발전은 후퇴를 하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가장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왕성했던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른다.


수원 화성의 건립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체제공의 책임하에 다산 정약용에 의해 건립되었다

정약용은 자신이 발명한 '거중기'라는 축성 기계를 이용하여 공기를 단축하고 건축비를 절감하였다고 한다.

  

화성은 화성과 정조임금에 대한 아무런 지식없이 가보면 그냥 단순히 성벽걷기만 하게 되지만 화성 축조의 배경과 기법 그리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등등 제대로 공부를 하고 돌아보면 하루 종일 돌아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

나도 이번에 새벽 일찍 일어나서 KTX타고 광명역에 내려 수원까지 가서 오전 내내 3시간 이상을 걸어서 돌아보았지만 반 정도 밖에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에 가을에 날씨 좋을때 다시 한번 방문하여 이번에 보지 못한 화성행궁과 팔달문 창룡문과 동남쪽 성곽 그리고 가능하다면 야경까지 보고 싶다.


수원 화성에 대해 아래에 인터넷에서 퍼온 지식을 먼저 공부를 하고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원화성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음력)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흑미로 평가 받는다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남북으로 두개의 수문이 있다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舖)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將臺)와 노대(弩臺)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공심돈(空心墩)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 (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암문(暗門)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 (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 (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암문의 안팎에다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하였다.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舖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각루(角樓)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 (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 (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봉돈(烽墩)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벽돌로 짓고 포루(舖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포루(砲樓)는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남포루(南砲樓)는 팔달산 중턱 서남암문 근처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준공되었다. 구조는 동북포루와 거의 동일하다. 여장에는 타구와 전안을 뚫었고, 타구의 안에는 전판문을 달았다. 마루, 지붕 등의 구조는 서포루와 비슷하다. 남포루에는 대포와 혈포가 각 2대, 총안 19개가 설치되어 있다.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垛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과 북수문 사이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중층이며, 도리는 납도리이고 홑처마의 5량 구조이다. 포루 밖으로는 우진각지붕을 안으로는 박공지붕으로 하였다.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계단을 설치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도로 했다. 그 외는 북서포루와 비슷하다.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북포루(北舖樓), 서포루(西舖樓)등이있다.


동북포루(東北舖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동이포루(東二舖樓)는 봉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누각 밑에는 총안을 뚫어 놓았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3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납도리를 썼으며, 지붕틀은 5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하층의 총안 등은 동북포루와 동일하다.


북포루(北舖樓)는 서북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5년 (정조 19년) 2월 20일에 준공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중층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처마는 홑처마에 민오리집이며, 상층에는 주위에 전판문을 달았다.


서포루(西舖樓)는 서장대 남쪽 서암문과 서삼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18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내면은 나무사다리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와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복원 상태이다



다음 2부는 제가 직접 보고 찍은 사진들을 올려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