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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충청도

제 7회 대구시달서구의사회 회원 및 가족 야유회 - 충남 공주 부여

 

제 7회 대구시달서구의사회 회원 및 가족 야유회

 

주제: 백제 유적 탐사

일시: 2011년 6월 12일

장소: 충남 공주시, 부여시

참가인원: 회원 및 가족 약 180명

 

 

 

07:00 출발 어린이회관 (07:30 달서구문화예술회관)

10:00 공주 공산성 (시간관계상 무녕왕릉은 유인물로 대치)

11:20 공주 출발

12:00 부여 도착 중식(구드레 돌쌈밥 80명 향우정 100명)

13:00 부소산성 ( 낙화암 고란사 )

14:30 황포돛배 (편도, 구드레 나루터에서 버스 탑승)

15:00 궁남지

16:00 정림사지 5층석탑 및 부여박물관

17:30 부여 출발

18:30 금강휴게소 도착 석식 (2층 씰크로드 120석 1층 식당 60명)

19:30 출발

21:00 대구 도착 해산

 

 

관광지 자료

 

1. 공주 공산성

 

공산성(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475) 한강유역의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 유적은 임류각 추정왕궁지 연지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공북루 진남루 동문루 금서루 영은사 광북루 등 각 시대별로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 성곽을 따라 공산성을 시계반대방향으로(금서루에서 우측으로 시작) 한바퀴 도는데만 약 1시간 소요되며 맨 위의 광복루 이후부터 되돌아오는 길은 성곽의 경사가 심한 곳이 있으니 어린이 및 노약자는 광복루 이후부터는 가급적 성곽을 따라 걷는 것 보다는 성 안의 넓은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음.

 

* 산성입구 매표소-비석군-금서루-쌍수정,왕궁터-진남루-영동루-광복루

-임류각, 명국삼장비-만하루-공북루-공산정-입구

 

 

 

2. 무녕왕릉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5호분과 6호분 사이의 7호분이 무령왕릉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고분군 내의 7호분 무덤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은 현재 총 7기가 있다.

1~5호분 : 백제 굴식 돌방무덤

6호분, 무령왕릉(7호분) : 벽돌무덤

무령왕릉의 구조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원형 구모양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무령왕릉의 지석 (국보 163호)

 

지석이 발굴되어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지석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이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 의 청회색 석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다.

무령왕이 523년에 죽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하여 2년 3개월간 가매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한국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석수 (국보 162호)

 

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으며 재료는 응회암제이다.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고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고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위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새겨져 있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목관

 

목관의 모조품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나는 금송으로 밝혀졌으며,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금송은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목 과재는 수령 3백년 이상인 거목이었는데 금송은 키가 30미터 지름이 1미터 정도가 보통이다. 금송은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관재로 최고급으로 여겨지며 일본에서는 지배계층만 사용하였다. 왕의 관은 동쪽에 있고 왕비의 관은 안쪽, 즉 서쪽에 놓여 있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자 등 중국 물품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대에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벽돌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글씨가 새겨진 벽돌은 '…士壬辰年作(사임장년작)' 라고 글씨가 새겨진 벽돌과 '大方(대방)' '中方(중방)' '急使(급사)'명문이 압출(壓出)된 벽돌이 있다. 문양 있는 벽돌에는 각각 짧은 변과 긴 변에 문양이 있는 것이 있는데 짧은 변에는 연꽃무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로 장식되고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 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로 장식되었다.

 

무덤 양식무령왕릉의 아치형으로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써 중국 남조에 속하는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의 무덤의 양식과 유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백제로 들여갔다는 기록도 있어 무덤의 축조에 양나라의 기술자들이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별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의미의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무덤의 양식은 보수성이 강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데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를 통해서 무령왕시대에는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최초 무덤 내부 상황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짐승(石獸 : 석수) 모양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은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받침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되었다.

 

 

부여

 

부여라 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다.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이면 부여는 금강의 하류에 있는 충남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 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ㆍ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보고 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한 가지고 있다. 신라의 수도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부여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부여라는 나라는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져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다. 결국 고구려에 통합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 나라의 하나이다. 이 부여에서 금와왕이 동쪽으로 옮겨와 지금 길림성 연길 지방에 동부여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내려와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그 지배층 일부가 다시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였다. 무령왕이 중흥을 이룩하기 위하여 천도의 계획을 하였고, 그 아들 성왕대에 수도를 부여로 옮겼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좋은 의미에서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여시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같이 화려한 백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의 백제여인들이나 황산벌에서 산화한 한 맺힌 백제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아래 무참히 도륙 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의 현장인 부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애환을 노래한다.

 

공주로 천도한 뒤 계속 불안했던 백제왕실은 무령왕과 성왕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원상을 회복, 보다 강성한 왕국 건설의 웅지를 가지고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하였다. 부여로 천도한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호남평야지대의 경제기반과 진취적인 대외 활동을 통해 이 같은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다. 그리하여 백제역사상 부여시대(538~660년) 123년은 백제문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을 뿐아니라 삼국문화중 최고의 예술혼을 피우게 되었던 곳이다. 또한, 일본고대문화 형성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곳으로 이곳 부여에서는 백제의 역사문화를 찾기 어려워도 일본 지방에서 백제의 아름다운 문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외 영향력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부소산성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

사적 제5호.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은 현재 군창(軍倉)터가 있는 곳으로 둘레 1,500m의 성벽을 등고선을 따라 거의 토축했는데, 일부 석축한 부분도 있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와 백제식 가람의 방형 건물터가 있으며,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남지

 

궁남지(宮南池)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池)이다. 별궁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으로 짜 올린 어정, 기와편,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서동(薯童)으로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버스 배정

 

 

 

 

 

1호차(수성1): 손효돈 38명 (24회원+ 이학희 사무국장)

 

 

박성민 한금주 방성혁(2) 최찬오(2) 구환모(2) 임우택(2) 홍진표(2)

 

전재윤(2) 이강혁(2) 윤덕구(2) 서대진(2) 이재준(2) 손병우(2) 최은석(2)

 

김태형 이재혁 김태상 강태경 김석준 조창식 김귀란 신정애 손창용(2)

 

 

 

 

2호차(수성2): 이성우 (4) 40명 (13회원 + 최언희 대리)

 

 

윤혜정(2) 김대혁(2) 김경숙(2) 김동환(3) 이준성(3) 송윤호(4) 서석주(3)

 

김성수1(4) 김성수2(3) 하준욱(3) 도홍직(4) 한창호(2)

 

* 아동 학생 :16명 (6세 이하 5명 초등학생 9명 중학생 2명 )

 

 

 

 

3호차(달서1): 홍성범(2) 29명 (13회원)

 

 

안원호(2) 이효성(2) 조영호(2) 안도환(2) 정선권(2) 윤여득(3)

 

김교선(2) 김창원(2) 변인수(2) 최상규(4) 이천원(3) 도영호

 

 

 

 

4호차(달서2): 최성진(2) 30명 ( 8회원)

 

 

박서정(4) 김도상(4) 장효찬(4) 이계현(3) 이장희(3) 엄성우(4) 이윤경(6)

 

* 아동 학생: 14명 (7세 이하 5명 학생 9명)

 

 

 

 

총 137명(회원 58 가족 77 직원 2)

 

 

 

 

 

인솔자 필독(인지)사항

 

1. 버스 탑승후 휴게소, 식당 등에서 재탑승시 항상 인원점검 및 파악 유의할 것

2. 참가회원 및 가족들에게 명찰 유인물 개인간식 및 음료 지급

3. 칠곡 휴게소에서 김밥 및 아이스박스 전달 받은 후 김밥을 나누어 줄 것 (8시경)

   2,4호차는 인원수만큼만 준비했으므로 4세 이하 아동 대신 1개는 기사님 드릴 것

4. 2,4호차 버스는 아동들이 있으므로 과자를 별도로 준비하였음

5. 아침 식사후 각 버스별로 회원 및 가족 소개 시간을 가질 것

6. 회원 소개하기 전에 오늘의 전체 일정을 설명해줄 것

 

7. 공산성에 대한 보충설명

 

 

백제 문주왕시절부터 성왕(무녕왕의 아들) 까지 약 60여년간의 백제의 도읍지

성곽을 따라 걸어가는데 왕복 약 1시간 소요됨

가파른 오르막,내리막이 있으므로 노약자와 어린이는 성곽보다는 성안의 넓은 길을

이용할 것

11시 15분까지는 버스에 탑승 완료할 것

 

8. 점심식사

 

 

1,3호차 67명은 구드래돌쌈밥

 

각종 야채 및 쌈과 반찬 돌솥밥과 함께 돼지주물럭 또는 소불고기 중 택일함

단 4인 기준으로 한 개의 불판이 나오기 때문에 불고기 8상 주물럭 8상 준비

4인씩 취향대로 앉아서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2,4호차 70명은 옆집 향우정 소불고기 정식

 

수많은 가짓수의 반찬들과 쌈 그리고 돌판 소불고기가 나옴

7세 이하 어린이가 10명이므로 18테이블(72명)이라도

4인분 15개 3인분 3개 테이블을 준비해도 충분할 것으로 보임

단 4세이하 어린이가 있는 4인 가족에게 3인분만 시켜도 되겠는지 물어볼 것

다 먹을 수 있으니 4인분을 요구할 경우에는 4인분 불고기를 준비.

(답사때 와서 먹어보니 불고기의 양도 많고 먹을 반찬이 너무 푸짐해서

음식을 사람 수대로 시킬 경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쓰레기 발생 가능성이 높음)

 

9. 식사 후 오후 1시에 버스탑승 부소산성 입구 도착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매표소 지나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군창지 영일루 쪽) 가면

약간 걷는(10분 정도 더) 코스이며 좌측으로 가면 곧장 낙화암으로 감.

천천히 걸어도 낙화암까지는 30-40분 정도 소요 사진 찍고 고란사로 내려와서

고란사 구경 후 고란사 유람선 선착장에서 황포돛배를 탑승

30분 정도 후 구드래 나루터에 도착 버스 탑승

 

10. 오후 3시경 궁남지(사비시대의 궁궐의 연못)로 출발 궁남지 산책 및 관람 후

오후 4시경 정림사지 5층석탑(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 이동 구경 후

부여박물관 관람(미정)

 

11. 오후 5시경 부여 출발 6시 30분 금강휴게소 도착

금강휴게소 2층 레스토랑 메뉴는 우거지 갈비탕 또는 올갱이국임

만약 이들 메뉴 외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원할시는 1층 일반 식당이용

(1층 일반 식당 이용시 4인 가족 기준 3만원 3인 가족 2만원 지급함)

 

 

 

 

요약 사진

 

07: 대구출발

 

 

 

 

10:00 공주 공산성 도착

 

 

 

공산성 투어

 

 

 

11:00 수문병 교대식 참관

 

 

 

12:30  부여 부소산 입구 구드레돌쌈밥  점심식사

 

 

 

 

14:00 부소산성 낙화암

 

 

 

 

 

 

14:30  황포돛배 타고 백마강 유람

 

 

 

 

 

15:00 부여 정림사지 박물관

 

 

 

 

현존하는 최古의 석탑인  정림사지 5층석탑

 

 

 

 

16:00 부여 박물관 

 

 

 

금동대향로(국보)

 

 

 

 

17:00 궁남지

 

 

 

 

궁남지의 수련 (윤여득 원장님 & 큰딸)

 

 

 

미스타 달서구

 

 

 

미시 달서구^^

 

 

다같이..

 

 

 

 

 

16:30 금강휴게소 (저녁식사; 2층 실크로드 레스토랑 )

 

 

 

 

사랑의 그네

 

 

 

우리는 동기들..

 

 

21:00 대구도착-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