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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 투어 시즌 two <4> 경복궁과 북촌

서울 고궁 투어 시즌 two <4> 경복궁과 북촌..



2년전 고궁투어 시즌 1은  창덕궁 전각과 비원 그리고 창경궁을 둘러봤고 

이번 시즌 2는 청계천과 경복궁 그리고 북촌을 돌아보기로 계획을 짰다




덕수궁과 정동길




10시에 나와서 덕수궁 다 돌아보고 정동길 걷고 12시경 경복궁으로





광화문 앞 이순신장군 동상

서울 사람들은 자주 보겠지만 시골 사람은 이런 것도 신기하다




세종문화회관도 작정하고 봐야 볼 수 있다



















세종대왕 동상

그리고 발명품들







  경복궁









광화문과 인왕산




해태

광화문까지는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흥례문을 들어가기전에 매표소가 있고

일반 성인은 3천원이었다





흥례문을 지나야 비로소 경복궁 입장





한복입은 여성들  아니 남성들도 참 많다

마치 일본 기온 거리의 기모노 차림의 관광객들처럼








근정전앞 근정문





근정전





근정전




  정일품 품계석에서 인증샷















용상




천정에 용 문양








  사정전 근처






경회루가 보이고...





경회루 앞





경회루



국보 제224호.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건물.

근정전 서북쪽에 있는 방형 연못 안에 세운 이 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기 위한 곳이었다.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태원전으로 향하는 길

북악산이 보인다




태원전으로 가기 위해 처음 들어가는 문  건숙문






태원전 경안문





태원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두는 곳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시신을 이곳에 안치하였다.

국상()이 있을 때에는 장례용으로 사용했으며 그외 궁녀들이 주로 거주했다. 2005년 중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태원전 [Gyeongbokgung Taewonjeon, 景福宮 泰元殿] (두산백과)






















향원정



1867년(고종 4)부터 1873년(고종 10)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회루()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원래 연못의 북쪽에 연못과 정자를 연결하는 취향교()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남쪽의 다리는 1953년에 가설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향원정 [景福宮香遠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향원정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 (苑林)공간이 된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향원지의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이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는 본래 목교로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취향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없어졌으며, 현재는 1953년에 지은 다리가 향원지 남쪽에 있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폭 165cm)이다.

향원지의 북쪽으로 녹산지역에 있는 담장에는 인유문(麟遊門)이란 일각문(一角門)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봉집문(鳳集門)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연못은 한층 아늑한 정취(情趣)에 싸여 있었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근정전 뒷 모습





향원정 뒷편에 있는 건청궁



[ Gyeongbokgung Geoncheonggung , ]

요약
경복궁 안에 있는 궁궐로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곳이다. 1873년 고종이 사비를 들여 짓기 시작하여 1884년부터 기거하였다.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1909년 완전히 헐렸다가 2007년 복원되었다.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이라고도 불렀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가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건물 배치는 크게 장안당()·곤녕합·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건청궁 [Gyeongbokgung Geoncheonggung, 景福宮 乾淸宮] (두산백과)







함광문과 안쪽에 보이는 옥호루






추수부용루와 장안당






집옥재

고종이 서제로 사용하던 곳






자경젼

 

자경전은 경복궁의 침전이며 대왕대비가 거처하였던 대비전이다.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되었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중건되었다.

이 곳은 익종(:)의 비이며 고종의 양모가 된 신정왕후()가 거처하던 곳이다.

자경전(殿)이라는 명칭은 1777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덕궁에 자경당()을 건립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헌종()의 생모로 철종이 죽은 뒤 고종에게 대통을 잇게 하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여,

조대비()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자경전 [Gyeongbokgung Jagyeongjeon, 景福宮 慈慶殿] (두산백과)







자경전







  동십자각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궁궐의 망루였다.

이 목조누각은 1867년(고종 4) 경복궁 복원 당시에 세웠으며,

동십자각에는 원래 망루를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경복궁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망루의 기둥은 하방()과 창방()을 매우 간단하게 돌렸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벽채가 없이 트였다.

공포는 2익공으로,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만을 두었으나, 45도 각도로 짜여진 귀에만은 추녀 뒷부분을 받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앞으로 길이 나면서 경복궁이 훼철되었고 길 한가운데 동십자각만 달랑 남게 되었다.

현재는 사직로와 삼청로가 만나는 길 가운데 위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동십자각 [Gyeongbokgung Dongsipjagak, 東十字閣] (두산백과)








*** 1분 만에 터득하는 간략한 대한제국의 역사***



강화도령 철종이 죽자 흥선대원군와 조대비는 의기투합 흥선의 둘째아들 12살 명복군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한다 

 그리고 60년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몰락하고 서원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성공을 거두고 확고하게 정권을 유지하지만 경복궁 중건에 따른 당백전 발행과 노역으로 인하여 국고가 바닥나고 민심 흉흉해지면서 결국 대원군 집권도 10년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흥선대원군은 20살 성년이 된 고종과 그를 컨트롤하는 중전 민씨의 뜻에 따라 운현궁으로 물러나고..

임오년의 군란(1892년)과 갑신년의 정변(1894년)및 강화도 수호조약(1895년) 등으로 조선에서의 일본의 입김은 점점 크지는데 반면 영원한 대국인 청나라는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제 살길 찾는데도 버겁다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과 민비는 결국 힘있어 보이는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고..일본을 배척한다...

이러는 민비를 눈에 가시로 여기던 일본은 드디어 을미년에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하게 된다 (을미시해)


이런 천인공오할 만행에도 일본에 대항할 아무런 힘도 방법도 없던 고종은 어느날 몰래 감시를 따돌리고 야반도주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아관파천)


1897년 고종은 독립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제 조선은 어느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겠음을 천명 자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표방하며 우리나라가 왕의 나라 조선이 아닌 황제국의 지위를 가진 대한제국임을 선포하고 고종도 대한제국 초대 황제에 오른다 189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국 선포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것을...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 러시아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조선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을사늑약으로 정점을 찍는다

1905년..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5년 후 결국 일본은 한국을 속국으로 병합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병

그리고 일제 식민지로 35년 몇개월..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고...






북촌으로...


경복궁 경회루 보고나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좀 올 수도 있다고 나와있지만 설마 비까지 내릴까? 라며 우산을 가져가질 않았었다

다행히 아내는 양산을 겸한 조그만 우산을 가방에 넣어와서 머리에 비를 피할 수는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청동길




































춥고 배고프고 치졌다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음식이 필요했고 마침 적당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갈비로 유명한 벽제갈비 식당





이 집 갈비는 비싸서 ^^

그냥 점심 메뉴만 두 개 주문





설렁탕과




우거지 곰탕으로






줄 많이 서는 집 삼청동 수제비를 뒤로하고





맞은편의 이 한방차 단팥죽 카페도 줄서서 들어가네요..




북촌








홍어를 안 좋아하는 관계로^^





  삼청동에서 베트남 대사관 옆으로 해서  가회동으로 넘어옴











여기가 북촌 한옥마을  하이라이트라는데

비가 와서 경치나 조망이 그저 그런 듯^^




골목에 사람들(중국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관광객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하면 주민들이...^^


























비가와서

춥고 피곤하고

더이상 걷기도 싫고

   안국역에서 지하철 타고 호텔로 가서 집 찾아서 다시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서울역으로 와서 6시 기차로 대구로..

집에 오니 몸이 천근 만근









이 날 하루동안 걸었던 기록이다

신기록이었다